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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속에 나타난 천지창조 (상)
 임번삼
명지대학교 외래교수
전 대상그룹 식품당당 대표이사
한국창조과학회 이사

대학 3학년이던 1964년, 나는 철학과 종교서적에 심취해 있었다. 고려대학교 농화학과에 입학하며 1학년 때는 국내문학서, 2학년에는 해외문학서, 3학년에는 철학·종교서, 4학년에는 위인·전기서를 섭렵한다는 목표를 실천하는 중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나간 모범적인 크리스천으로 자부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주일예배에 참석하느라, 극장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으며 고등학교 1학년 때는 과학의 허구에 대해 생물선생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아무런 학문적 뒷받침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나의 일방적인 참패로 끝났다.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까지 나를 감싸고 있는 것은 인생의 허무와 알 수 없는 절망감들이었다. 그것은 모두 불우한 환경 탓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1950년과 51년 사이 조부와 부친, 큰 형이 공비들에 의해 처참히 피살되었다. 굶기를 밥 먹듯 해야 했고 조모와 어머니의 계속되는 탄식소리는 어린 내 가슴에 필은 우울감을 심어주었다. 어떻게 보면 적극적인 교회생활을 어려운 가정환경을 망각할 수 있는 도피처로 삼은 셈이었다. 따라서 새벽기도는 빠지지 않을 정도로 신앙적 열성을 보였다.

그렇지만 이때까지의 신앙은 나 자신과 심성을 변화시킬 만큼 강한 동기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이 상태에서 접하기 시작한 카뮈와 사르트르의 실존적 허무주의는 나에게 강렬한 색채로 흡수되었다. 조금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암담한 현실들, 늘 한계를 체험하는 인간의 나약을 이 철학은 깊은 공감대를 형성케 했다.

야스퍼스나 키에르케고르는 초월자의 구원을 인정하는 유신론의 철학논리를 폈지만 신에 대한 단편적 사고 이상의 것을 주지 않았다.

이 무렵에 읽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내 삶에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신앙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인간은 인간다워야 하지 않는가. 인간은 모든 것을 누리고 획득하고 추구해야할 권리가 있다. 그동안 나는 '기독교' 라는 틀에 갇혀 사고와 행동을 억제당해 왔다. 책 내용처럼 새는 알을 깨는 아픔을 견디고 나와야 창공을 날으며 온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나도 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온 세상을 넓게 바라보자' 나의 의도적인 신앙포기는 교회 친구들에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결심은 번복될 수 없었다. 그토록 열심히 활동하던 교회학교 교사직과 성가대도 중단했다.

인간에게는 선악의 의지가 공존한다고 느껴졌다. 그것을 나 스스로의 의지로, 또 인간다움에 충실한 자세로 맞아보겠다고 의도했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다움이 '하나님의 영적세계' 안에 있으며 나의 이 무모한 신앙적 방황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깨달은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1966년 해군간부후보생으로 입대, 군 생활을 시작했다. 종교를 버리고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다는 목표를 세웠기에 모든 선택을 자유의지에 맡겼다.

인간의 제한받지 않는 자유는 세상적인 속성에 금방 물들게 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기 시작했으며 장교 숙소에서 노름으로 며칠을 밤새우기도 했다. 이런 생활에 몰입하면 나는 삶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남는 것은 아득한 공허감뿐이었다. 감각적인 것은 감각으로 끝났다. 그 무엇보다도 내게 '참된 만족'을 선사하지 않았다. 나는 이 속에서도 한계를 발견했다.

두 번째 내가 시도한 것은 학문적 성장이었다. 사물을 깨치고 지식을 습득하는 길만이 인간을 높은 가치의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해군 의무단 병리연구소에 근무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바로 옆방에는 생화학실이 있었는데 그곳 의사들과 함께 해군의 에너지 대사량과 영양상태 등을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이것이 내가 식품분야 연구생활에 몸담게 된 첫 시발점이었다.

1969년 제대와 함께 바로 부산에 있는 미원(주) 연구개발실에 입사했다. 나는 발효분야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성과를 올릴 때마다 성취감과 만족을 느꼈다. 많이 알고 배우는 길만이 '최고'라는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1971년에는 대만과의 합작회사 설립 관계를 준비했다. 그때 영어회화를 못하는 내가 통역을 하겠다고 나섰다. 남은 5개월 동안에 습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2개월을 학원에 다닌 후 남은 기간동안 상황별로 구성된 회화책을 모조리 구입해 외었다. 무사히 통역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적성취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래서 1972년 법학을 전공한 아내와 결혼식을 올린 지 15일 만에 회사에서 보내주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신혼의 단꿈보다 '많이 배우는 것'이 내겐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학문적 성취의 만족에도 한계가 있었다. 남보다 빠른 승진,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으나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될 수 없었다.

1980년 가을, 당시 나는 37세의 나이에 계열사인 한국크노르(주)의 품질관리 및 연구개발부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의 정국은 '광주사태' 등으로 몹시 어지러워 '안개정국'이라고 불렸다.

'국가와 사회가 몹시 어렵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나는 무엇인가. 직장생활을 통해 자기만족을 얻으며 착실히 승진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을 다하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추구했던 욕망의 덩어리들 이 한없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나를 괴롭힌 것은 이런 암담한 모든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절망감이었다.

잠을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던 연말의 어느 날이었다. 하나님께서는 15년이나 당신을 잊었던 초라하고 불쌍한 이 영혼을 다시 찾아 주셨다.

현실문제에 깊이 고뇌하며 가슴 아파하는 가운데 '삶' 자체에 대한 의문들이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상식적 범위의 질문들이었지만 내겐 절박한 과제로 압박해 들어왔다.

사람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 것일까. 왜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짧은 생애에 이다지도 고달프고 슬퍼해야 하는가. 인생사에는 초연한 듯한 저 해와 달 우주, 산천초목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명은 어떻게 태어난 것인가. 나 스스로 그 어떤 질문에도 명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런 복합적인 요소들이 범벅이 되어 나는 우울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것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이런 어느 날 나는 퇴근길에 레코드 상점에 들러 네 개의 찬송가 테이프를 샀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평소 가지 않던 레코드 상점에 들렀으며 찬송가 테이프를 샀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림을 받은 것이었다.

집에서 나는 그 찬송가들을 듣고 또 들었다. 무언지 모르게 이 노래들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대부분 예전에 불러 보았던 곡들이라 귀에 익었다. 이 중에서도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야곱이 잠깨어', '잃었던 영혼 찾았고', '죄인 오라 하실 때' 등의 가사가 영혼 속 깊이 울려 퍼졌다.

찬송가에 몰입한지 3일째 되던 날 밤이었다. 찬송가를 듣기위해 카세트의 스위치를 누른 순간 메말랐던 심령을 상쾌하게 적셔주는 물줄기의 느낌을 받았다. 그 가사에 내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그토록 생생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찾았다. 그것은 논리와 이성이 아닌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주님, 길을 잃고 세상에서 헤매던 한 영혼이 주님을 다시 찾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도 후 내 앞에 펼쳐진 모든 세계는 이전의 세계가 아니었다. 기쁨과 은혜가 충만한 환희의 세계였다. 나는 성경을 본격적으로 묵상할 계획을 세웠다. 우선 창세기, 마태복음, 사도행전, 요한계시록을 읽기로 했다.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자 신비와 경이의 깨달음이 나를 계속 놀라게 했다.

창세기에서는 천지만물이 창조된 경위와 인간의 창조목적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할 인간이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였다.

마태복음을 읽으며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알 수 있었다. 또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탄생과 복음이 이방세계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그 과정을 볼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우리 인류가 잃어버린 낙원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심판주로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음의 눈이 열리며 인생의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게 되었고 인생관도 하루하루 달라져 갔다.

성경을 통해 진리를 하나하나 깨쳐 가는 과정은 감탄과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생명과학분야에서 일하고 있던 나는 특히 창세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었다.

빛 (에너지)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으며(열역학 제1법칙) 인간에게 그것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권을 주셨다.

그런데 처음 사람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했고 공의의 하나님은 이 죄에 대한 대가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떠나게 하셨다. 인간의 역사는 이때부터 형벌을 받는 기간이 되었다. 따라서 사람을 포함한 모든 만물이 늙거나 부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열역학 제2법칙).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죽음의 벌'이 형벌의 의미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란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죄 된 세상에서 고통 받으며 영생하는 것보다 일정기간을 고생하다 슬픔과 괴로움이 없는 우리의 본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사고력을 주셨다. 그래서 인간은 모든 사물의 형태와 법칙을 해석하고 평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과학과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영역을 벗어나는 죽음이나 우주의 신비 등 초월적인 세계는 그 무엇으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한치 앞도 미리 알지 못하는 인간의 왜소와 무력함은 결국 스스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 꿇게 되어 있다' 나는 집 근처 교회에 등록을 하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신앙생활은 모든 것이 기쁘고 즐거웠다.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싶었다. 처음에는 성가대에 들어갔다가 교회학교 교사까지 겸직했다.

나중에는 해외선교부장을 맡았다. 직장에서도 신우회를 조직, 성경공부 모임을 이끌었다.

 

출처 : '열리는 영의 세계'(1991년 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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